다이어트를 관둔 30대의 냉장고는 이렇게 생겼다.
탈다이어터 – 요요와 절식 굴레에서 벗어나기
나는 탈다이어터다. 더 이상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나 자신에게 준 타이틀이다. 탈다이어터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의 안정이다. 다이어트가 내 삶을 송두리째 쥐고 흔드는 강박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먹고, 일상적으로 운동하며 사는 것.
지난 3n년 인생 동안 나는 강박적으로 다이어트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체중감량에서 요요로 이어지는 사이클을 꽤 여러 번 반복해 겪었다. 각 체중감량의 방법이 절식이었든 정석(적당히 먹고 운동하기)이었든 그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열심히 뺀 살은 어김없이 차곡차곡 다시 차올랐다. 나는 내가 평생 그렇게 다이어트와 요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작년 8월. 다시 74kg에서 마음먹은 ‘다이어트’를 시작으로 나는 지금 식이장애와 서서히 이별하는 중이다. 평생 나를 따라다닐 그림자 같았던 그 지긋지긋한 놈과, 드디어.
내 식이장애 양상은 다이어트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패턴 그대로였다. 머릿속이 항상 음식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했고, 음식 위주로 일상이 돌아갔다. 나에게 음식은 철저히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었다. 먹으면 안 되는 것으로 분류했던 음식을 참고 참다가 한 입 먹기라도 하는 날엔 ‘망했다’라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는 폭식이 이어졌다. 먹을수록 우울해졌고, 우울할수록 움직이지 않았고, 그럴수록 체중이 점점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식이장애와 이별 중인 지금 내 모습은 이렇다. 더 이상 칼로리를 세어가며 먹거나, 특정 음식을 기피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당기는 음식을 종류에 상관없이 온전히 즐기며 먹을 수 있다. 어떤 음식이던 스트레스받지 않고 양을 적당히 조절해 먹을 수 있다. 또 운동을 “해치워야 하는 일/해야만 하는 일”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침내 다이어트가 내 삶을 통제하던 날들을 뒤로하고, 거기에 쏟아붓던 소중한 내 에너지를 이제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내 삶과 일상에 쏟을 수 있게 되었다.
방콕에 거주하는 탈다이어터의 냉장고
이런 변화를 겪고 있는 나에게 잘 채운 냉장고란 거창한 식재료가 있는 냉장고가 아니다. 포만감과 만족감이 느껴지는 음식을 대충 10분이면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냉장고, 딱 그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을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식재료들로만 간단하게 채운 냉장고. 리스트가 정해져 있어 장 볼 때도 크게 고민이 필요 없는 그런 냉장고. 나의 소소하면서도 믿음직스러운 냉장고를 지금부터 소개하겠다.
제일 만만한 탈다이어터 국물 요리의 히어로들
냉장고의 가장 윗 칸은 국물요리를 만들어 먹을 때 집어 때려 넣을 수 있는 재료들로 채운다. 왼쪽 파란 포장지에 담긴 천사채는 베이킹소다와 라임주스를 이용해 당면과 똑같은 식감이 나게 만들 수 있는 저칼로리 면 재료다. 맑은 국물이나 떡볶이 소스에 넣기도 하고, 종종 볶음우동을 만들기도 한다. 오른쪽에 있는 계란 두부와 순두부는 국물요리에 없으면 섭섭한 단백질 소스다.
고메 샐러드 박스와 계란
일주일에 적게는 한 번에서 많게는 서너 번까지 사다 먹는 음식이 있는데, 바로 아래 사진의 왼쪽에 있는 박스 샐러드다. 고메 마켓이라는 태국의 체인 슈퍼마켓에 있는 샐러드바에서 100g당 35밧에 구매할 수 있는 샐러드다. 박스를 80% 잎채소와 20% 기타 음식으로 가득 채우면 150밧 (약 5,500원) 정도다.
계란도 시간 날 때 한 번에 삶아뒀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일주일 정도 먹는다. 끼니에 곁들여 먹거나, 허기질 때 계란만 꺼내서 간단히 먹기 좋다.
식이섬유 – 과일과 야채
맨 아래 칸엔 과일과 야채를 보관한다.
과일은 이제 처음 태국에 왔을 때만큼 많이 먹지 않는다. 열대과일을 물처럼 흡입하던 날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지나왔다. 사과는 한입 크기로 썰어 요거트랑 같이 먹기에 좋은 데다 잘 상하지 않아서 사두고 먹는 편이다. 열대과일은 그때그때 당기는 것으로 조금씩 사서 먹는다. 이번 주 냉장고에 있는 것은 파파야와 용과. 파파야는 썰어두고 2-3일을 먹는데, 이때 라임을 같이 썰어서 즙을 뿌려 먹으면 한 오백 배쯤 더 맛있어진다.
야채는 감자 양파 옥수수 세 가지를 항시 구비해둔다. 양파는 볶음 요리할 때 넣기 만능이기 때문. 또 밥솥 없이 사는 자취인이라 쌀밥을 대신할 탄수화물이 당길 때 옥수수와 감자가 그 역할을 한다.
가벼운 소스와 드레싱
소스류는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농사지으신 귀한 고추로 만든 엄마표 고추장을 필두로 샐러드드레싱과 케첩, 머스터드 핫소스 정도를 갖추고 있다. 저 중간에 있는 노란 뚜껑의 양파 드레싱이 너무 기름지지 않으면서도 맛있어서 채 썬 양배추에 둘러먹기 정말 좋다.
커피와 누들
찬장에 보관해두는 재료로는 커피와 오트 파이버 누들이 있다.
아침은 먹지 않고 커피로 대신하기 때문에 커피는 떨어져서는 안 되는 식재료 중 하나다. 그라운드 커피빈과 (800ml 크기의 프렌치프레스에 잔뜩 만들어 두고 하루 종일 마실 수 있도록) 캡슐 커피 두 가지를 항상 구매해둔다. 요즘 마시고 있는 그라운드 커피는 태국의 쿠팡 격인 라자다에서 저렴하게 구매 가능하고 또 꽤 맛이 있는 Passalacqua 커피. 귀여운 포장지는 덤이다.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국물요리가 당길 때 면이 없으면 어딘가 아쉽다. 그래서 오트 파이버 누들을 찬장에 두고 넣어 끓여 먹는다.
탈다이어터 영혼의 단짝: 제로칼로리 소다
식후 어딘가 허전하고 달달한 무언가가 당기고 허기가 덜 채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 때 제로칼로리 소다만 한 게 없다. 한 캔 시원하게 때리고 양치질을 하면 된다. 방콕에서 판매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제로칼로리 소다를 다 섭렵해본 결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와 맛은 아래 세 가지로 추려진다.
곤약젤리
입이 심심할 때 간식으로 최고인 곤약젤리. 태국에는 제로 슈거 곤약젤리류가 최근에야 생기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한국에서처럼 큰 파우치에 담기고 맛도 다양한 브랜드는 보이지 않고, 아래와 같이 작은 팩에 들은 한입 크기 젤리들이다. 시중에 판매하는 브랜드를 최소 다섯 종류는 먹어보고 안착한 브랜드는 아래 사진에 있는 Jele. 그중에서도 청포도 맛이 가장 맛있다. 또 냉동 보관했을 때 보다 냉동실에 뒀다 먹을 때 더 만족스럽고 한 두 개로 멈출 수 있다.
이렇게 채운 식재료들로 평소 식사의 대부분을 큰 고민 없이 해결하고,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땐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섭취한다. 대신 이미 냉장고 안에 내가 좋아하는 재료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외식을 하거나 배달음식을 시키기 전에 선별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이게 지금 진짜 먹고 싶은가?” 하고 한 번 더 묻는 것이다.
그렇게 먹기로 결정한 음식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러니 식이를 제한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음식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나에게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와 즐거움을 주는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